https://www.youtube.com/watch?v=pDtwOgMpFk4&feature=youtu.be

몽골의 한 겨울이었습니다

영화 40도까지 내려가는

그냥 강추위에 벌어서 몽골을 횡단하는데요

몽골은 강이 많습니다

겨울에는 강이 꽁꽁 얼어붙어 있습니다

제가 몽골을 횡단하는 동안

강을 건널 때 두려운 마음이 있었습니다

얼어붙은 강을 지나다가

그 밑으로 빠지는 것은 아닌지

그런 상상과 두려움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큰 돌을 가져다가

한 걸음 내딛기 전에 얼음을 돌로 내려치는 겁니다

얼음이 괜찮으면 한 걸음 내딛고 또 돌로 내리쳐서

또 괜찮으면 내딛고 그렇게 강을 건넜어요

1미터 2미터 더 깊이 강들은 꽁꽁 얼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안전하게 건널 수 있었던 것이지요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살아갑니다

그런데 때로는 우리의 믿음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늘 견고하고

신실하면 우리 마음에 갈등도 없고 고민도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마음이 요동친다는 겁니다

어떨 때는 우리의 믿음이 

정말 저 밑바닥까지 떨어져 있어요

또 어떨 때는 천국을 살고 있습니다

수련회가 끝나면 어떤 유혹과 핍박이 와도 

다 견뎌낼 수 있을 거 같아요

그때 믿음의 상태는 최상급입니다

그런데 또 시간이 지나면 그 믿음이

변질되는 것 같아 보입니다

내 믿음의 품질이 

완전히 불량품인 거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누구나 이런 신앙의 갈등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전히 우리 속에 죄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지으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이

과연 이게 구원받을만한 믿음인가

아니면 가짜 믿음인가 혼란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박살 나고 깨어진 경험도 없어요

확실하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난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지금까지 여전히 희미하게 하나님을 믿어왔지

강력하게 내 삶이 완전히 변화되고

암말기였다가 죽음 직전에서 살아나고 

뭐 그런 체험도 없어요



그러다 보니까 과연 내 믿음이 진짜 믿음인가라는

고민과 갈등이 들 때도 있습니다

여러분 몽골의 강이 단단하게 얼어 있습니다

그런데 제 마음은 요동쳤어요

두려웠습니다

 

이 강을 무사히 건널 수 있을지 고민 들었습니다

당시 제 마음의 상태는요 거의 불신앙과 같아요 

내가 건널 수 없을 것이라는 믿음이 약한 상태입니다

담대하게 베드로처럼 예수님이 함께하시면

물상 태라도 걸어서 건널 수 있다고 믿는 정도의 

담대한 믿음이 아니에요

얼음의 단단한 상태를 보고 

돌로 쳐서 깨지지 않는 것을 보면서도

그런데 제 마음에는 얼음이 깨질 것 같은 

두려움이 드는 거예요

내가 빠질 것 같은 두려움이 듭니다

그래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조마조마한 거예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뭘까요?

제 마음에 상태 제가 느끼는 감정이 중요합니까?

아니면 이 강이 얼어붙어있는 상태가 더 중요한 것입니까?

한 번 다르게 생각을 해볼까요?



정말 단단하게 얼어붙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강이

사실은 강이 얕게 얼어붙어있었어요

겉으로는 단단해 보여서 두려움 없이 믿음으로 달려갔어요

전혀 의심하지 않았어요 깨질 것이라는 의심, 

두려움 없이 달려갔는데 이 얼음이 쫙 갈라지면서 

이 사람이 물에 빠진 겁니다



여러분 구원이라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우리의 갈등 불안의 이유는 

우리의 마음이나 감정의 상태에 

구원의 근거를 두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내 확신보다

얼음이 단단하게 얼어있는 상태입니다

정말 예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는가?

예수께서 부활하셨는가? 

그 부활하신 예수께서 내 안에 계시는가? 

마음의 "확신"보다 그 "사실"이

더욱 중요합니다



역사를 통틀어 어떤 믿음의 사람도 

사도바울과 견줄만한 사람은 없을 겁니다

누구에게 물어봐도 사도 바울은 역사적으로 

가장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었어요

완벽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는 완벽하게 하나님을 믿었던 사람이에요



그런데 참 신기하게 그런 그가 

로마서 7장 전체를 통해서

고백하고 있는 것을 보면 정말 믿기지가 않아요

이건 어느 수준의 고백이냐면 안 그래도 연약한 내가 

내 신앙이 가장 다운되었을 때, 가장 바닥을 칠 때

그때에 가질만한 고민을 

사도바울이 하고 있다는 거예요



자신 속에 두 사람이 있답니다 

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선을 행하기 원하는 사람

구원을 받은 새사람이죠?

또 한 사람은 죄를 짓기 원하는 사람

구원받기 전 옛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계속 싸운다는 거예요



여기까지 인정합니다 사도바울도 인간이니깐 

그런데 롬 7:23절에 보면 내 지체 속에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자신이 죄의 법에 사로잡혀있다고 합니다

충격적인 고백을 하죠

롬 7:242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 고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과연 내가 그리스도인일까? 내가 구원받았을까?

천국이 확보되어 있을까? 두려움이 엄습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것을 고백하고 있다는 거예요



어떤 학자들은 바울이 로마서 7장을 쓴 것은

그가 예수 믿기 전이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개혁주의 학자들은 대부분이 로마서 7장을

바울이 예수님 믿고 난 이후에 했던 고백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니까 참 재미있는 거예요



바울이 예수 믿기 전에 이런 고백을 했다면

그것은 당연한 겁니다

그런데 이것은 예수님 믿고 난 이후에 

고백이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예수님 믿고 난 직후,

이제 갓난아기처럼 믿음이 어린 수준이 아니라

로마서 7장을 바울이 기록한 시점은 바울의 

인생에 있어서 신앙의 전성기였습니다



로마에 있는 교인들도 그런 고민을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로마서에서 지속적으로 구원에 대해

믿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한 사람의 이야기를

한 장 통째로 하고 있는데요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창 15:6)



그러면 하나님이 의롭게 여기신 창세기 15장에서의 

아브라함의 믿음의 상태를 우리가 주목해 살펴봐야 합니다

과연 그 당시 아브라함의 신앙의 상태가 어떠했는가?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어서

그것을 하나님의 의로 여겨주십니다



그것은 구원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인으로 여겨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을 의미하죠

아브라함이 어떤 신앙의 상태에서 구원받았던 것일까요

성경을 보면 아브라함이 창세기 22장에 오기까지

그가 신앙의 훈련을 받습니다



그런데 보면 아브라함도 너무나 연약했어요

하나님의 함께하심, 하나님의 약속, 

온전히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흔들리는 그의 모습을 보게 돼요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약속으로 주셨죠

아브라함을 처음 부르실 때부터 

가나안이 약속의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갔더니 그 땅에 기근이 듭니다

그러니까 살기 좋은 애굽으로 도망가죠

아브라함의 모습을 보면 아직 믿음이 흔들리고 연약해요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창 17:17)

이 말씀을 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아브라함이 엎드렸으나 속으로는 웃었다

이것이 더 바른 번역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약속 앞에서 아브라함은 엎드렸습니다

그런데 속으로는 어떻습니까? 웃었다고 합니다

우리와 다를 바가 없지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엎드려 기도합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 봅시다

기도할 때 하나님이 다 이루어 

주실 거라고 믿으면서 기도하십니까?

하나님을 믿음으로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십니까?

그랬으면 좋겠는데 사실은 그렇지 못하죠

너무나 오랜 시간 동안 내 기도를 응답하시지 않은 것 같은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완벽하게 하나님을 신뢰합니까?



때로는 오늘도 하나님 잠잠하실거야

그러면서도 기도해야 하니깐 기도하고

그런 연약함이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까?



아브라함도 그랬습니다

하나님께 엎드렸지만 중심으로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합니다

아브라함도 우리와 같이 연약하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실 때



어떻게 말씀하시냐면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겠다"라고 하십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주어가 누구죠? 하나님이십니다

아직 아브라함은 연약하고 미약하지만

하나님은 그가 흔들릴 것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겠다



너는 아직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내가 너를 사용하겠다고 얘기하시는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네 믿음은 흔들리겠지만 

내가 너를 믿는 믿음은 흔들리지 않는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거 같은데

실상은 하나님이 우리를 믿어 주시고 

붙들고 계시다는 거예요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붙드는 거라고 생각을 해요

그래서 내가 하나님을 조금 덜 붙들고 있으면

내 믿음이 완전히 무너진 거 같아요

구원받지 못할 만한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실상은 하나님이 강력한 손으로

우리를 붙들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중국에 계셨던 분들은 아마 본 적이 있으실 겁니다

중국에는 이제 걸음마를 배우는 아기들에게

몸에 끊은 채워서 엄마가 잡고 다니는 것이 있습니다

끈을 아기 몸에 묶어서 위에서 딱 잡아줍니다

그러면 이 어린아이가 걸음마를 하는 거예요

자기 멋 댈지도 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위에서 엄마가 끈을 꽉 잡고 있는 거예요



마치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고 있는 

믿음이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때론 넘어져요

때론 흔들립니다

아기가 자기 마음대로 가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실제로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이

그 은혜의 손길이 하늘로부터 우리를 잡고 

우리의 삶과 우리의 인생을 

인도해가고 계시다는 겁니다



그 손은 너무 강력해서 누구도 그 사랑의 손길을

끊을 수 없다고 로마서 8장에서 말합니다

하나님이 붙드시는 그 전능하신 손길로부터 

누구도 간섭할 수 없고 흔들 수 없고 

넘어뜨릴 수 없습니다



악한자가 만질 수도 없다고 요한 1서에서는 말합니다

하나님의 강력한 손이 우리를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죄에 넘어지는 것 같고

우리의 신앙이 굉장히 미약해 보이고 

내가 과연 구원받기에 합당할까

생각들 정도로 죄와 씨름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고 계시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셔서

그것을 근거로 우리를 의롭게 여기시고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는 겁니다 때론 죄어 가운데 넘어질 수 있지만

그렇다고 마음껏 죄짓고 살아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시고자 하는 자녀들에게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열망이 있습니다



죄에 넘어지기도 하지만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 앞에 죄에 대해

죄송함과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진심으로 회개하길 원합니다

죄와 싸우길 원하는 의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길 원하는 믿음이 있습니다

내 믿음입니까? 하나님 믿음입니까?

하나님 믿음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신약성경에서 우리의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선물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믿음

그 안에 있는 믿음

그가 우리에게 주신 믿음

이라고 표현됩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신 은혜를 붙드시길 바랍니다

이 밤에 다시 하나님 앞에 회개하시고

아무 자격 없고 소망 없는 나를 그렇게 부르셨음에

진정으로 하나님을 찬양하시길 바랍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goeZTCYOlsk&feature=youtu.be

신대원 다닐때 교수님의 충격적인

교훈이 생각이 나더라구요

갑자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Guys ministry is messy



사역은 지저분해질 수 밖에 없대요

그때는 그것이 이해가 안갔어요

잊고 있었어요



그 말이 다시 한번 생각이 나는데

제 모습을 바라보게 되더라구요

전 성격상 깔끔한 것을 좋아해요

정리정돈 뿐만 아니라

인간관계도 그렇게 합니다



대화를 나누었을 때 논쟁되는 것을

싫어하구요

논쟁된 다음에 돌아서면 

왜 그말을 했을까 계속 후회되고

사역지를 떠날 때 깔끔하게 떠나면

비행기를 타면서 기분이 좋은데

하기 싫었던 말

왠지 코너에 몰려서 하게되었고

논쟁 가운데 내뱉었던 말이 

그 말을 왜 했을까? 계속 맴돌고



일본에서 살아서 그런것 같아요

하나님의 은혜로 중국에 들어가서

정신없이 돌아다녔는데

어느순간 제 모습이 안정권을 찾더라구요



논쟁하는거 싫어하구요

부딪히는거 싫고

오늘 말씀 준비하면서 한해를 돌아보는

저에게 주시는 말씀이었어요



발을 더럽히지 않고는

그 다음 성장이 없어

말에서 내려오지 않고는

그 다음의 돌파구를 경험할 수 없어

네가 숨어있는 안정권 동굴에서

나오지 않고는

교제라는 것은 이루어질 수 없고

교제가 없다는 것은 충돌도 없지만

얻는 것도 없어



일을 하시는 분들을 보면

부작용도 있어요

발이 더럽혀지더라구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기 때문에



실패 두려워하지 마

넘어지는거 두려워하지마

진흙을 무서워하지 말라는 거예요



지금와서 회개하고 결단하게 되는 것은

참 오랜기간동안 저는 말 위에

올라가 있었던 것 같아요



어느새 그렇게 된 내 모습

하나님 앞에서 깨트려야 되겠다 생각합니다

또 한번의 변화를 원합니다

또 한번의 성장을 원합니다



이루어 놓았다고 생각하는 것들

다 없던 것으로 하고

이제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곳으로

새롭게 출발하기를 원합니다는

기도를

이제 구체적으로 드리고 있어요



그날이 언제가 될지

그 형태가 무엇이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 몸부림 치고 있어요



지금까지 열심히 달려오면서 제 삶에

하나님께서 참 많은 축복을 주셨지만

이것으로 이제는 어느날 돌아보면

40이후로는 한 일이 없더라

라고 기록될까봐 무서워요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무엇을 한다는 것은

또 벗어야 되는 거에요

껍질 다 벗어버리고

피나는 노력하고 발이 더러워지고

나귀에서 내려오고



자기의 삶에 얽매였던 것을

벗어버리지 않는 한

절대 그 인생은 성장도 없을 것이며

돌파도 없을 것이며

한 일도 없을 거에요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을 

무엇으로 장식하시길 원하십니까

행복한 가정이십니까

안정된 인생이십니까

고상한 생활이십니까



 우리 예수님은 사사기에서 본 

압돈이란 존재와는 대조적이에요

인간 사사들은 진짜 위대한 최고의 구원자가

오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표지판들이었어요



압돈이란 사람은 사사임에도 불구하고

구원자임에도 불구하고

말에서 내려오는 것을 싫어했어요



그런데 우리 주님은요

최종의 구원자로서

하늘보좌영광 다 버리시고

이 땅에 발이 착지하셨어요



세상 모든 죄짐 짊어지시고

결국 피투성이가 되어서

피범벅으로 엉망으로 돌아가신 분이

우리 주님이세요



주님의 희생으로 탄생된 역사는

역사의 획을 그었구요

하나님 나라의 수문을 열었구요

수많은 주님의 백성들을 아버지 앞에

돌이키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이제는 그 주님이 가신 길

우리도 그렇게 쫒아가길 간절히 소망하며

오늘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결단을

겸손히 하시는 축복이 있으시길 축원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m7c647Ahd-s&feature=youtu.be

교만은 

우리가 온통 성공이나 실패를

생각하게 만듭니다

 

둘 다 교만이 일으키는 문제입니다



성공에 집착해서

사람들에게 성과를 인정받고 자만하거나

그렇게 인정받으려고 내 성과를 드러내서

자기를 자랑하는 것도 교만이고



실패에 집착해서

자기를 비하하고 깎아내리는 등

심하게 자책하는 것도 교만입니다



두 가지 모두

나에게 집중하고 있지요



겸손이 무엇인지 알면

더 잘 이해하실 겁니다

겸속이 교만을 이깁니다



c.s. 루이스가 겸손을 잘 설명했지요

겸손은 자신을 하찮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적게 생각하는 것이다

C.S. 루이스

그러니까 문제는

나를 대단하게나

하찮게 생각한다는 게 아니라



나 자체를 너무 많이 생각한다는 겁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나를 적게 생각할 때

교만을 이겨내고

그리스도를 더 많이 생각할 수 있고

그분의 승리와 대속과 희생을

더 많이 생각할 수 있습니다



겸손할 때 생기는 일은 기본적으로

' 자신을 잊어버리는 것 ' 입니다



자신에게 집중하는 교만과 정반대이지요

교만은 나를 하나님 위에 두고

겸손은 나를 하나님 아래에 둡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겸손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기 위해

나를 하나님 아래에 두는 마음가짐 입니다

 

 

한글자막 영상: Amadeus Kim(http://www.youtube.com/AmadeusKim)

 

https://www.youtube.com/watch?v=MUrnh0vkvqU&feature=youtu.be

기다리라

기다리라는 단어 안에

복음의 핵심내용이 다 포함되어있다고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주님께서 지금 당장에

응답하실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왜 지연시키시는지?



지금 당장에 응답하시기를 

원하신다면

왜 지금 나의 기도에 응답을 안하시는지



나를 사랑하신다고 하시면서

왜 내가 고난 받도록

그대로 두시는지



나를 정말 위한다고 하시면서

왜 아픔을 지속 시키시는지



지금 당장에 끊으실 수 있으면서

불구하고 왜 그것을

그대로 주님께서 보고만 계시는지



만약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를 응답 안해주시잖아요

우리가 보통 일반적으로 갖고 있는 생각은

You have nothing to lose

(당신은 잃으실게 없어요)



하나님은 잃을게 없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성경이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하나님의 모습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심이라

요한복음 3:16



그것을 토대로 이해를 하면요

이러한 결론이 나와요



지금 내 기도를 거절하시고

보류하시고 지연시키시고

때로는 내 기도에 침묵하시면

하나님께서 감수하셔야 될 손해가

크다는 거예요



그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무엇을 위해

창조하셨죠?

영광받기 위해서



" 하나님 위대하십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나님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하나님 어떻게 그리 선하십니까 "



그러한 관계를 나와 맺기 위해서

우리를 창조하셨대요

자 그런데요

기도 응답 안해주시잖아요

어떻게 되죠?



"나쁜 하나님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신앙을 져버리고

떠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주님께서는 감수하시고 

거절 하시는 거에요



왜 거기까지 하셔야만 할까

여러분 궁금하시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서

주시고 아끼지 아니하시고

십자가에 달려서 못박으실때까지

우리를 통해서 영광받기를 

원하시는 그러한 관계를 형성하시기를

원하신 하나님인데도 불구하고



기도응답 그까짓꺼

안해줬다고 떠나갈 수 있는

위험성을 주님께서 무릅쓰고 

기도응답을 거절하세요



왜 거기까지 하셔야만 하셨을까요?

왜 기다리게 하시는지

기다림의 궁극적 목적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님 자신을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주님께서 주시기 원하시는 것은

주님 자신이에요

관계를 갖는 다는 것은

교제를 한다는 것은요

에너지가 소모가 돼요

희생이 요구가 되구요

그리고 어떠한 시간이 투자가

되어야만 합니다



어떤 관계도 다 그렇죠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온전히 우리가 성숙하게

설립시키고 그것을 온전한 관계로

우리가 누리기를 원한다면요



에너지 소모가 필요해요

듣기 싫은 이야기 다 들어줘야 되구요

그 사람이 가기를 원하는길을

가줘야 되구요

때로는 피곤함을 감수하고

함께 있어줘야 하구요

먹고 싶은거 못먹을때가 있구요

하고싶은거 못할때가 있어요



그사람하고의 관계와 교제를 위한다면

모든 관계와 모든 교제는요

부모 자식, 친구, 사랑하는 이들과의

관계이건

모든 관계는 에너지가 반드시 소모되고

시간이 요구가 되고

물질 투자가 요구 되고

정신적인 투자가 요구 되는 거에요



그것이 없이는 관계는 

설립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똑같습니다



정말로 주님과의 관계를 

온전히 이룰려고 하잖아요?

예배 지켜야 돼요

피곤한데 밤에 무릎 꿇어야 돼요

정말로 귀찮은데 성경 펼쳐야 돼요



왜 우리는 영혼이 계속 메마르고 있습니까?

어려운 질문이 아닙니다

투자하지 않으니까



피곤한데 무릎 꿇어야 되고

잠자리 들고 싶은데 

기도하러 와야되고

티비 보고 싶은데

성경 펼쳐야 되고

나는 내 맘대로 살고 싶은데

예배 드려야 되고 

놀러가고 싶은데 

성수주일해야 되고 



그래서 우리는요

이러한 것을

번거롭게 여기거나

귀찮게 여겨요 

따라서 우리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뭐죠?

내 자신에 대해서 별로 

알리고 싶은 마음도 없구요

주님에 대해서 그렇게 알고 싶은

관심도 없어요



내가 원하는 것은 뭐죠?

주일예배 와서 옷자락 만지고

도망가는 거에요



와서요 

기도응답!

물질 해결!

사업축복!



옷자락 만지고 도망가는 것은

굉장히 간단합니다

주님에 대해서 알고 싶은 마음도 없고

내 자신에 대해서 알리고 싶은 마음도 없고

문제 해결 시켜주면요

만지고 도망갈 것 

제일 잘 아시는 분이세요



당장에 병 치유 주시잖아요

만지고 도망갈 사람이라는 

주님이 제일 잘 아세요



지금 당장 입학허락 시켜주잖아요?

비자문제 해결해주잖아요?

두번다시 주님 앞에

무릎꿇지 않을 존재라는 것을

주님께서 제일 잘 아세요



옷자락 만지고 돌아가서는요

삼십평생 육십평생을

교회 다녀도 교회 못만난다는 거에요

사업 문제 해결해주세요

가정 문제 해결해주세요

질병 문제 해결해주세요

학업 문제 해결해주세요

취업 문제 해결해주세요



그렇게 한평생을 교회 다녀도요

주님 못만난다는 거예요



" 너 이름이 뭐니? "

여전히 여러분 그 질문을 외면하고

돌아가시렵니까

아니면 오늘 그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서

하나님 지금 내 생활도 급합니다

지금 나 먹고살기도 급하구요

내 눈앞에 있는 학업문제 급하구요

가정문제 숨막힐 것 같구요

이 가난문제 나를 쫒아오고 있구요

하나님 내가 이것을 포기한다는 것은

이것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보류한다는 것은

나에게는 죽을 것 같은 경험이지만

왠지 모르게 내 가슴에 찾아오셔서

나에게 속삭이시는 

주님을 내가 느꼈으니

난 오늘 결단합니다

일단 주님 만나고 봐야 되겠습니다



그렇게 결단하면 인생이 바뀔 것입니다

그 한번의 결단으로

우리 신앙이 바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렇게 만나는 거에요



누구든지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고

죽고자 하는 자만 산대요



오늘 그 결단을 하심으로

주님 만나시는 축복이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TITbA_NVV_8&feature=youtu.be

우리는 고난의 상황을 접하면

우리가 무엇을 잘못 했을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저는 고난을 당했을때 우리를 돌아보고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을까를 생각해서

잘못을 하나님께 회개하는 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난이

우리가 무엇인가를 잘못했기 때문에 주시는

시련과 시험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미국 동부에 있을 때

어떤 자매가 저에게 아주 급하게 전화를 했어요

존스홉킨스 대학에서 생물학으로 

박사과정을 하고 있던 자매였습니다



저를 잠깐 만나고 싶다고 해요

제가 찾아갔던 곳이 정신병동이었습니다

어떤 이유인지 온몸이 아프고 통증이 찾아오면서부터

거식과 우울증이 찾아와 힘들어했습니다



2시간동안 얘기하는 가운데 

자매가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요

자기는 원래 음악을 전공했다는 겁니다

음악을 너무 잘했대요 

하나님이 재능을 줘서 음악으로 유학을 왔다고 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속에

음악에 대한 소명과 기쁨이 없어지더라는 겁니다

다른 것을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민하다가 생물학으로 전공을 바꿨습니다

생물학에서도 탁월한 실력을 발휘해서

존스홉킨스 박사과정까지 갔는데

갑자기 몸이 아프기 시작한거에요



아프기 시작하며 

자매가 뭘 제일 먼저 생각했을까요?

하나님의 뜻은 피아노 였는데 (음악)

내가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생물학으로 

전공을 바꾸었더니 하나님께서 나를 치신다

그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저를 만났을 때는

그것을 확인하기 위하여 만났습니다



저는 그 자매에게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오해이고

미래에 대한 예지를 허락하지 않으셨기에

우리가 미래를 알 수 없고

하나님이 우리 길을 인도하시니

고난중에 있더라도 

하나님의 심판이라고만 생각하거나

징계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겠다고

설득했습니다



자매가 이해를 했는지 모르지만

무튼 자매가 퇴원을 했습니다

그런데 자매가 계속 그것으로

괴루워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나를 치셨다..'

내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아서

하나님이 벌하셨다



그것으로 계속 힘들어하고 괴로워 했습니다

한번은 연말에 꼭 한 번만 더 만나자고 해요

그런데 제가 다른 곳에 있어서

만나지 못했습니다



1주일 뒤에 제가 전화를 했는데요

전화가 안돼요

그리고 다음날 자매가 

자살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너무 견딜 수 없고 하나님에 대한 분노가

큰 원인이었을거에요



어떻게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대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내가 전과를 했다는 이유로

나에게 이런 고난을 주는 것에 대한

부당함



무조건 순종해야 하는데

하나님께 무조건 순종할 수 없기 때문에

마음에 가지는 회의와 분노

그것을 견디지 못해

자매는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

하나님께 항변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 욥을 기억합니까?

하박국을 기억합니까?

예레미야를 기억합니까?



악인들은 형통하고 

의인들은 고난당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 어찌 악인들이 형통한 것을

그냥 보고만 계시냐고

하나님께 항변하고 따졌던 선지자들을 기억합니까?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왜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여러분 신앙생활 하면서

무조건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욥처럼 고난을 당하면

하나님 어찌하여 내게 이런 고난을 주냐고

하나님께 항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항변하고 깊이 사과하고

또 따지듯이 물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과 대결해서 하나님을 설득해보겠다는

의도가 아니라

욥의 경우에서 보듯이

욥이 간절히 원했던 것은 답이 아니라

하나님 입니다



자기가 당하는 고난의 원인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내 고난의 자리에 하나님이 거기 계신가를 

묻고 있는 겁니다



저는 그런 질문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는

사건에서도 

우리는 그런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도대체 왜 아브라함의 자식을

죽이라는 그런 끔찍한 요구를 하시고

그의 순종을 확인하기를 원하셨을까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리는 사건을

구속사적인 면에서 봐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가장 평안할 때

하나님이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아 부르시고

아브라함은 모든게 평안했어요

이민생활 다 적응하고

가장 마음에 아픔이던 자식을 얻어서

자식이 당시 유대인 전통에 의하면

이삭이 16살이거나 37살쯤 되었다고 짐작하는데

정확한 나이는 모르지만

많이 성장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아들이 잘 자라고 자리를 잡은 것에 대해

감사해서 아브라함이라고 하나님이

부르실때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

아마 이 대답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감사가 있었을 것이고

순종의 마음이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주님의 말씀이

지금까지 아브라함이 살면서 당했던 고난보다

더 감당할 수 없는 끔찍한 고난이었습니다

네 아들 사랑하는 독자를

나에게 재물로 바치라 명령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아브라함이 불평도

따졌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을 믿었던 것 같아요

그가 하나님을 믿었지만

아브라함에게 고통이 없었다고

생각하면 오해일 겁니다



아브라함은 너무 고통스러웠고 힘들었습니다

너무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콧노래를 부르면서 주님이 말씀하셨으니

내 아들이라도 기꺼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겠다는 감격과 기쁨이나

열정 그런 마음이 아니었을 겁니다



밤새도록 잠도 못잤을 겁니다

아들에게 뭐라고 말해야 하나

아내에게는 뭐라고 말해야 하나

그런 고민들..

자기 아들을 죽여야 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도대체 왜 그러시는 걸까

내가 뭘 잘못했을까

아브라함이 이 고민들 하지 않았을까요?

혹시 다른 방법은 없을까?

왜?를 수도 없이 외쳤을 겁니다



왜, 왜, 왜

내게 이런 고난이 왜 하나님은

아들을 달라고 하시는 걸까?

수도 없이 외쳤을 겁니다

아들을 데리고 이제 사흘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아들이 묻습니다

여기에 횃불도 있고 나무도 있는데

제물은 어디에 있습니까?

질문에 하나님이 예비하실거야

라고 답하고 있지만

그 마음은 찢어질 듯 아픈겁니다



너무 고통스럽고 너무 괴롭습니다

그리고 올라가서 꽁꽁 묶었어요

16살이든 37살이든 

이 아들 정말 대단합니다

아버지가 묶어서 제단위에 올려놓고 있는데



그냥 있어요

저라면 도망가도 벌써 도망가죠

그리고 아브라함이 칼을 들고

죽이려고 할 때 

하나님이 부르십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 알았다

말씀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삭에게 손을 대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그런데 만약 주님이

아브라함의 손을 잡으시며

하시는 말씀이

아브라함아 됐다~그만해라 껄껄~

하고 웃으셨다면 

나는 네가 네 아들과 너무 사이좋게 지내길래

네 아들을 너무 사랑하는 것 같길래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는지 

네 아들을 더 사랑하는지

내가 한 번 시험해 보고 싶었는데

너는 역시 내사람이야

너는 네 아들보다 

나를 정말 더 사랑하는구나 됐다

기분좋다 하하하



이쯤되었으면 저라면 하늘을 향해 

주먹을 들 것 같아요

하나님이 이러실 수 없습니다

이런 시험은 부당한 겁니다



어떻게 이렇게 내 마음을 아프게 하고

내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주님이 모르지 않으실텐데

그 아들을 죽이라는 아픔과 고통을 통하여

결국 하나님이 하고자 하신것이 

내가 얼마나 순종하는 사람인지

확인하고자 하신 겁니까



저는 그렇다면 분노했을 것 같아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전면적인 

회의를 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유함을 얻었지만

하나님의 고통은 그때 시작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 사건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랑하는 아들을 즐겨 부르실 때에

자주 사용했던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들을 구원하시고

우리를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은혜가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가

하는 것을 역사의 한 시점에서

우리에게 알려주셔서



그것으로 하나님을 소망하고

하나님의 마음

(사랑하는 예수님을 버려야하는 고통)

을 알려주기 위해 

아주 위험하고 모험적인 

이 일을 주님께서는 계획하시고

감행하신 것입니다



그 아들(이삭)을 바치는 것을

불의한 일이고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는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 그분의 자녀들에게

하고싶으셨던 말씀은

내게 네게 준 아들(예수 그리스도)



그 아들이 바로 그런 아들이란다

내가 너를 이렇게 사랑한다

그 말씀을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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